[아침을 열며] 2013년 윤석열 수사팀장, 2023년 박정훈 수사단장

정제혁 기자 2023. 8. 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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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압 VS 항명”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이 2013년 10월21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기관보고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고(故) 채수근 상병 순직사건 조사와 관련해 집단항명 수괴죄로 입건된 박정훈(대령)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2023년 8월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입장을 밝히는 모습이다. 서성일 기자·연합뉴스

10년 전 의식을 잃어 오늘 깨어난 사람이 신문을 본다면 세상이 잠들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고 대통령 이름 석 자에 또 한번 놀랄 것이다. ‘수사 외압’ ‘사건 축소’ ‘항명’을 소재로 한 사건이 10년의 간격을 두고 검찰에서 군으로 배경만 갈아끼운 채 재연되는 데서 익숙함을, 주요 등장인물의 위치가 정반대로 바뀐 데서 어지러움을 느낄 것이다. 폭로한 자가 폭로당하는 쪽으로, 눌림을 당한 자가 누르는 쪽으로 위치를 바꾸고, 비타협적이고 결연한 폭로가 이제는 대통령이 된 옛 폭로자 주변을 겨누는 모습에 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싶을 것이다.

2013년 검찰 특별수사팀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와 2023년 해병대 수사단의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 수사는 윗선의 사건 축소 외압과 수사 책임자의 외압 거부라는 서사의 뼈대가 같다. 댓글 사건 수사 때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과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놓고 수사팀과 법무부가 대립했다면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에선 해병대 1사단장 등 사단 지휘부의 혐의를 수사결과보고서에 담는 문제를 두고 수사단과 국방부가 충돌했다. 댓글 사건 수사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외압 배후로 지목됐다면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에선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의 수사 관여를 의심케 하는 당사자 증언과 일부 정황이 나오고 있다.

두 수사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외압에 굴하지 않은 수사팀장의 존재이다. 윤석열 검찰 특별수사팀장은 국정감사장에 나와 “이렇게 된 마당에 사실대로 다 말씀드리겠다”며 수사 외압을 폭로했고, 국정원 전 심리전단 직원들에 대한 압수수색·체포 영장 청구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배제된 뒤 법무부에서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해병대 수사단장을 맡았던 박정훈 대령은 입장문과 기자회견을 통해 국방부의 외압 사실을 폭로하고 안보실의 개입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그는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이하 총 8명의 간부를 혐의자로 적시한 수사결과보고서를 경찰에 이첩했다가 보직해임되고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됐다.

정제혁 사회부장

윤 대통령은 댓글 사건 수사 때 만들어진 ‘강골 검사’ 이미지를 밑천으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 윤 대통령의 정부에서 댓글 사건 수사 때와 같이 외압이 가해진 것도, 수사책임자가 탄압받는 것도 이율배반이다. 이번 일은 ‘검사 윤석열’을 부정하는 ‘대통령 윤석열’의 최근 행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말 특별사면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남은 형기를 절반으로 줄였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4일 그를 가석방한다. 민간인 댓글부대를 운영하고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위 풍문을 확인하는 데 국고를 쓴 혐의, 2012년 대선 개입 혐의로 원 전 원장을 수사하고 기소한 사람이 윤 대통령이다.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지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불법사찰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2017년 11월5일 ‘MBC 방송장악 관련 청와대 홍보수석실 관련성 검토’라는 제목의 수사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검찰은 이동관 후보자가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재직하던 2010년 3월2일 국정원이 작성한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에 대해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실질적인 문건 작성 지시자로 추정된다”며 “청와대 홍보수석실에서 국정원을 통해 MBC에 대해 청와대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경영진을 구축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방송을 제작하는 기자·피디·간부진을 모두 퇴출시키고 MBC의 프로그램 제작 환경을 경영진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방송사 장악의 계획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었다.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이 수사를 지휘했다.

윤 대통령의 자기부정은 여야 대치선을 횡단해 야당 지지자나 중도층과 연결하는 마지막 다리를 스스로 불사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수 시민의 공감과 지지를 포기한 대통령에게 남는 선택지는 완력을 통한 통치밖에 없다. 검찰, 경찰, 감사원을 앞세우고 방송 등 언론을 단단히 틀어쥐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군사작전하듯 공영방송 장악에 나선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반발력도 커지는 법이다. 겉으로 단단해 보이는 댐도 기초가 부실하고 수압이 강하면 크고 작은 균열이 쌓여 속절없이 무너진다. 박근혜 정권이 그랬고, 그때 처음 균열을 낸 사람이 윤석열 수사팀장이었다.

정제혁 기자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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