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이어 변형윤… 한국 경제학계의 별들이 졌다

김태훈 2022. 12. 2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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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없이는 분배 없다" 강조한 조순
유학파·시장론자 위주 '조순학파' 꾸려
'분배'와 '형평'에 무게중심 둔 변형윤
한국 경제에 비판적인 '학현학파' 태동
“학현학파는 ‘분배 없이는 성장 없다’를 강조하고 조순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장 없이는 분배 없다’를 더 강조하는 듯합니다. 변형윤 선생님은 저희 학생 때 ‘여러분, 지식인으로서 정부가 잘못하는 건 꼭 비판하세요’라고 말씀하셨어요. 변 선생님 제자들은 주로 국내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현실에 비판적인 글을 많이 썼죠.”
한국 경제학계의 양대 석학으로 통한 조순(왼쪽),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세계일보 자료사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으로 이 대학 총장까지 지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2018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학현’(學峴)은 원로 경제학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호(號)로, 학현학파란 변 명예교수의 경제 이론을 따르는 학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젊은 시절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수학하며 변 명예교수와 조순 명예교수를 둘 다 스승으로 모셨던 정 전 총리가 둘의 차이점을 분석한 것이다. 물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정 전 총리는 두 대학자 중에서 조 명예교수를 선택해 그 수제자가 되었다.

훗날 2022년은 한국 경제학계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두 원로 학자가 나란히 세상을 떠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1928년생인 조 명예교수는 6월23일 94세를 일기로, 1927년생인 변 명예교수는 그로부터 꼭 6개월 뒤인 12월25일 95세를 일기로 각각 별세했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조순학파와 학현학파가 있다’라는 말처럼 두 경제학자는 학문적 성취는 물론 후진 양성에서도 막상막하의 역량을 발휘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경제학원론’(조순)과 ‘한국경제론’(변형윤)은 필독서로 통했다.
2004년 12월 당시 시민단체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운동’ 이사장을 맡고 있던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앞줄 오른쪽)가 서울중앙지검에서 ‘사랑의 연탄 나눔’ 약정을 체결한 뒤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왼쪽은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던 이종백 전 국가청렴위원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정 전 총리 말처럼 학현학파는 무게중심을 ‘분배’와 ‘형평’에 조금 더 싣고 있는 반면 조순학파는 ‘성장’에 대한 관심이 좀 더 크다. 조순학파에 관해 정 전 총리는 “자유주의자가 많고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많다”며 “미국에서 학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시장에 대한 믿음이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학파 위주의 조순학파와 달리 학현학파는 국내파 위주다. 뒤집어 말하면 변 명예교수의 제자들은 한국에서 경제학을 연구하며 우리 경제의 각종 문제점을 바로 옆에서 들여다본 만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비판적 안목을 키웠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경제의 핵심 가치인 분배와 성장에 대한 시각차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은 상아탑을 벗어난 사회 참여에서도 상반된 궤적을 보였다. 변 명예교수는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수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박정희정부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를 심사하기 위한 평가교수단 일원으로 위촉된 그는 대통령,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한 회의 도중 ‘부익부빈익빈’이란 표현을 써가며 비판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엔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아 민주화를 요구했다가 5공 신군부에 밉보여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1984년에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복직한 그는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노동자 편에 서서 분배와 형평을 강조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점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진보 성향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현실정치에는 끝내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1995년 7월 초대 민선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운데)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 왼쪽은 당시 정무부시장이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 세계일보 자료사진
변 명예교수가 5공 신군부와 ‘악연’이었다면 조 명예교수는 그와 반대였다. 1950년대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 교관으로 복무한 조 명예교수는 육사 생도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중에는 11기 전두환, 노태우 생도 등도 있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6공이 출범했을 때 조 명예교수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연장선’이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6공 후반에는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영삼(YS)정부 시절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놓고 정권과 사사건건 충돌하다가 임기 도중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당시 야당 지도자이던 김대중(DJ) 총재는 조 명예교수의 기개를 높이 샀고,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초대 민선 서울시장(1996∼1997)을 역임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DJ와 결별한 조 명예교수는 야당 국회의원과 총재까지 지내며 우리 정치사에 족적을 남겼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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